2008년 05월 14일
사랑하는 20대의 친구들에게
누가 20대를 죽였는가
우석훈이 20대를 비난할 자격이나 있나?
글에 들어가며
"누가 20대를 죽였는가"라는 글을 보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현실에 대한 처절한 절규,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절망에 가슴이 메였다. 같은 20대로서 이미 남 문제가 아니었다. 썩어문드러진 상처가 곪고 곪아서 이제 우리 20대들 중에 이렇게 SOS를 부르짖고 있는 이들이 있구나. 손을 잡아주기를 바라고 있구나.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구나. 이 울부짖음에 인간으로서, 그리고 같은 20대로서 응하고 싶다. 같이 울고 손을 잡아주고 싶다.
먼저, 현재 우리 세대가 나아가야할 길에 대해서 고민을 할 수 있고 블로그질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이야말로 나보다 더 힘든 삶을 사는 20대에 비하면 극히 지나친 호사임에 미안하다. 나 또한 처절한 생존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다른 20대와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다른 20대보다는 조금은 책을 읽고 조금은 생각을 할 기회가 있었기에 글을 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이제 우리 서로 고민하고 대화해서 서로 연대해서 나아가자고 제안하고 싶다.
20대를 위한 변명
우석훈 선생의 "88만원 세대"를 아직 읽지 않았다. 언젠가는 보겠지만 머릿말을 읽다가 어차피 뻔히 아는 내용일 거라 생각하고 덮어두었다. 어차피 내가 보는 신문에서 보는 그의 칼럼들, 그리고 비슷한 이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말이다. 먼저 20대의 무력함부터 변명하고 한다.
지금의 20대가 그 전 세대들과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좋은 대학만 가면 보장되었던 기존의 한국의 취업질서가 붕괴되었다. 대학에서도 고등학교 시절 못지 않은 취업준비과 경쟁이 요구되었다. 자연히 대학은 취업학교로 전락하였고, 인간성을 논하는 인문학은 자연히 몰락하였다. 평생고용이 보장되었던 정규직은 명목만 남았고, 비정규직이 대세가 되어 고용의 불안은 증가되었다(이 부분에서 짚고 가야할 점은 많은 20대가 386세대(현대 30대 중반이상)가 정규직 자리를 꾀차고 있으면서 20대를 착취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규직인 386세대 이상의 세대들은 살아남은 이들이고, 많은 이들이 40대면 명퇴 등의 명목-38선, 명태 이런 신조어 생김-으로 자영업자 또는 무직으로 전락하였다). 여튼 지금의 20대는 기성세대가 겪은 20대와 달리 훨씬 심한 경쟁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의 추세라면 현재의 10대도 이러한 경향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 개인으로서 형성되는 보편적인 나이가 있다. 사춘기라고 불리기도 하는 보통 10대부터 20대 초반 무렵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모든 세대는 이 시기를 겪고 정체성을 형성했다. 80년 이후에 출생한 현재의 20대는 10대 중반까지는 80년대, 90년대의 호황 아래 비교적 부족함 없이 어느 세대의 10대 초중반보다 행복한 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90년대 중반 이후 호황이 끝나고 IMF를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의 경제가 세계경제로 편입되어 미국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로 아래 놓임으로 인해 극도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세대이다. 그래서 더욱 더 20대는 이러한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에 무력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호황기에 자란 세대가 불황기를 얼마나 현명하게 이겨낼 힘이 있겠는가. 이것으로 20대의 무력함을 변명하고자 한다.
386세대가 대학문을 통과하면 안정적인 삶이 보장될 수 있었다는 것으로 386세대의 극렬하고 목숨을 걸었던 투쟁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군사독재정권은 너무도 공고하였고, 물리적으로 압도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 선두에 섰던 용감했던 이들은 생명을 걸고서야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정의에 대한 신념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투철한 믿음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따랐던 대중으로서의 386들은 대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순간 어느정도 생계는 보장된 것이 현실이었다. 전두환정권과 올림픽을 거쳐서 우리 나라의 경제는 피크를 맞이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지금의 20대처럼 20대를 도서관에 앉아서 영어를 공부하거나 고시를 공부하며 살 필요는 없었고 상대적으로 취업에의 불안에 시달릴 필요도 없었다. Spec이라는 단어도 생겨날 필요도 없었다. 조금은 여유와 낭만이 있었고, 스스로 사유하며 책을 읽고 고민할 시간은 지금의 20대보다 많았다. 이것으로 20대의 무식함을 변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덧붙여 386세대들이 싸워야했던 적은 당시 미국으로 대변되는 제국주의와 군사독재정권이었다. 즉 보이는 적이었고, 물리적이었고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20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고 교묘한 적들이다. 386세대가 이겨내었던 군사독재정권은 적어도 우리 손으로 절단낼 수 있는 적이었다. 그러나 20대가 싸워야할 적은 신자유주의, 우리 손으로 절단낼 수도 없을 것 같은 거대한 흐름, 머리가 커지고 보니 자기도 모르게 편입되어 버린 신자유주의가 그 적이다. 이 적에는 20대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세대가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느끼고 있다. 적이 너무 크고 그 실체조자 모호하기에 칼을 잡지도 못하고 있다. 체념과 비관만이 흐르고 있으며 결국 이명박이 당선되고, 한나라당이 과반을 점유하였다. 물론 저항은 있었다. 그러나 실패하고 결과는 처참했다. 우리의 작은 저항은 뒤에서 말하겠다.
386세대를 향한 저주는 답이 아니다
90년대 초에 구소련이 몰락한 이후 지금의 현재의 모습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본다. 이렇게 급속도록 그리고 광범위하게 그리고 통제불가능하게 세계의 경제질서가 신자유주의로 재편될 것이라고 누가 예측하였겠는가.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이러한 모습이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IMF로 불리는 경제공황 때 경제주체로 뛰고 있는 각 세대(현재의 20대는 제외)는 살아남기 위해서 정말 처절한 노력을 하였고 그러면서 정부도, 사회안전망도, 노조도 시민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들은 무력했거나 무너져 내렸다. 현재까지 노무현 정권은 이러한 것을 회복하려고 했던 당시 20대, 30대의 기존 정치질서에서 실질적인 마지막 저항이었다.
20대들 중 20대를 지켜줄 만한 질서를 만들지 못해서 386세대를 혐오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의도해서 이러한 질서가 생긴 것도 아니고 386세대도 다른 세대처럼 급속도록 재편되는 생존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고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물에 빠져서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 남을 구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고 비난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다. 이들은 새로운 질서를 파악할 지적 역량도 저항할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개가 되어 한나라당을 찍는 386을 저주할 수도 있겟다. 그러나 같이 개가 되어 한나라당을 찍은 판에 누가 누구를 원망할까.
따라서 지금의 20대가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386세대를 향한 분노는, 청소년들의 기존질서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여 덜 큰 어린아이가 징징대는 꼴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마치 온실속에서 곱게 큰 아이가 세상풍파에 던져졌을 때에 무기력하여 주저앉는 것과 같이, 고도의 호황 때 10대의 일부를 보낸 지금의 20대는 갑자기 거친 세상풍파를 만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불황기에 태어나 세상풍파를 견디고 자란 지금의 10대보다 20대가 더 나약해 보이는지도 모른다.
현실인식의 결핍, 20대에 사춘기를 겪다
미국쇠고기수입협정반대집회에 나가는 10대들에 비교되는 20대들 중 욱하는 심정이 생길 만도 하다. 사실 비교당하는 지금의 20대가 억울한 면이 많다. 10대는 적어도 지금 생계, 즉 밥벌이의 문제에 직면해 있지는 않다. 아직은 부모와 학교의 보호 아래 있다. 그러나 20대는 먹고사니즘 문제에 직면하여 있다. 그래서 나는 감히 쉽게 도서관에서 토익공부를 하고 있는 20대에게 거리로 나갈 것을 제안하지 못한다. 직장에서 밤 10시까지 야근을 하며 고된 일과에 행복을 헌납하며 회의를 느끼는 20대에게 노조를 만들거나 가입할 것을 제안하지 못한다.
미취업과 해고라는 감당하기 힘든 불안이 그렇게 한다고 해결될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거리로 나가서 해결되기에는 정부는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고(그래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했던 것이다) 한 번 무너진 신뢰로 생긴 불안은 지독하게도 깊고 넓다. 연대는 기대하기 낙망하다. 내가 길거리를 나설 때 그 시간에 공부를 한 시간 더 해서 나보다 점수를 더 받을 학생들, 내가 노조에 가입하여 회사에 낙인 찍힐 때 끊임없이 원서를 들이대고 있을 수 많은 미취업자들이 드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군인은 하나의 물건에 불과하듯이, 우리는 이미 기업에게는 소모품이자 기업에서 생산한 물건을 소비하다 그다지 길지 않은 삶 살다 죽는 객체로 전략한지 오래다.
미성숙할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보다 주변과 사회에 대한 분노만 커져간다. 물론 정당한 분노가 있을 수 있고 이러한 것이 행동으로 이어질 때 사회는 분명 변화된다. 그러나 기성세대를 향한 유아기적인 몸부림은 답이 아니다. 그들도 지금 질서의 피해자이고 현실인식을 못해서 같이 개가 되어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두 손으로 같이 뽑았다. 같은 피해자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은 화난다고 동료에게 총부리질을 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정당하지도 않고 변화시킬 수 없는 분노이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우리가 노무현을 왜 사랑했다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생존경쟁의 질서의 변화를 갈망했다. 386세대에게는 잊고 있었던 옛 첫사랑이었을 모르겠지만 노무현은 20대에게는 현재의 첫사랑이었다. 그만큼 뜨거웠고 기대도 컸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획일화된 교육(이 것은 모든 세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이러한 교육으로 인해 20대임에도 덜 자랄 수 밖에 없다.)을 받고 자라 현실에 대한 합리적이고 냉철한 인식은 없었지만, 노무현은 "변화"를 약속했었고 무엇인가 지금 짜여진 질서에 대한 거부감과 분노를 20대는 노무현을 사랑함으로서 분출하였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확대대는 비정규직 문제를 20대는 보았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 더욱 심해진 생존경쟁,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 끊임없이 양산되는 낙오자들을 보면서 20대는 좌절했다. 철저한 학습과 현실인식을 기대하기 힘든, 즉 덜 자란 20대에게는 반동만이, 악다구니만이 남았다. 마치 노무현 한 사람 때문에 모든 것이 잘못 된 것처럼.
젊을수록 학습능력이 좋고 도덕적인 경향이 있다. 20대는 노무현 정권에서도 과거와 다름없이, 비도덕적이고 시장경제의 룰을 어긴(부동산투기 등) 이들이 노동을 해서 정당하게 벌어들이는 이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예전부터 이런 일들(강남특수, 올림픽특수의 부동산 투기)은 비일비재하였지만 노무현 정권들어서 더 심해졌다(이명박 정권들어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된 것을 보면 이것이 노무현 정권이 가속화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철면피같은 냉혈한들이, 인간을 도구화시키는 이들이 물질적으로 성공하고, 물질적으로 성공한 것이 능력있고, 도덕적이고, 사랑받는 이들(요즘 나오는 거론할 가치도 없는 거의 모든 자기계발서에서 이렇게 떠든다)라고 20대는 세뇌당했다. 20대의 학습능력이 그들의 도덕성을 압도하는 순간 20대는 스스로 무기력한 사회의 부속품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 모든 세대 모두 다를 바 없다. 덜 자란 20대는, 덜 자란 국민들과 함께 스스로 개가 되어 이명박과 한나라당에 꽃을 바쳤다.
20대를 위한 제안
내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얼마 없다. 그래서 나도 무력함과 비애감을 많이 느낀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기성세대와 기성질서를 향해서 자조하지는 않는다.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고, 인간에 선함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역사를 비롯한 사회과학에 대한 작은 공부가 나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미 신뢰와 믿음 연대 변화가능성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말하고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제안하는 것은 아직 나에게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도 썼다.
먼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알아야 한다. 당신이 자신과 주변, 그리고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잃어버리는 순간, 당신은 기존 질서를 이루는 하나의 부속품이 될 것이고(그것이 밑바닥일지 정점일지는 모르겠다만) 당신은 부속품이 되는 순간 정점에 오르기 위해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밖에 없으며, 훗날 썩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40대, 50대에 발견하게 될것을 말이다. 지금도 많은 40대. 50대의 가장들이 자식들에게 무시받고 아내에게 버림받으며, 자신의 허송해버린 젊은시절을 안타까워하며 우울증에 빠져들고 있음이 증명한다. 얼마 전에 삼성비리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도 스스로 밝혔듯이 이러한 부류중에 하나였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공부와 행동이다. 기존 교육제도에서 배울 수 없었던, 그래서 386세대를 향해서 "왜 알려주지 않았냐고" 울부짖었던 것들을 우리 스스로 배울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386세대도 우리와 같은 주입식 획일화된 교육을 받고 자랐고 그들도 개인으로 각성하지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그들도 배우지 못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지 못했다는 점을 잊지 말고, 우리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 이 공부가 토플공부가 아님은 물론이다. 틈틈히 사회과학과 인문학 공부를 하자. 정말 "틈틈히"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일단은 살아남아야 행동을 할 수 있으니, 도서관 대신 거리로 나가라거나, 직장에서 노조를 만들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는 없다. 너무 위험부담이 크고 현재 그렇게 하면 지금의 질서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분위기상 당신이 나간다고 남들이 같이 나간다는 보장도 없고, 이 사회는 이미 낙오자는 돌보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신뢰와 믿음을 잃는 것은 쉽고 쌓는 것은 너무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당신 혼자 설치다가는 또라이 되기가 쉽다는 말이다. 스스로 영웅이 되지 말고 주변의 동지들을 만들라.
그래서 나는 제안한다. 공부할 시간이 없고 열의도 없다면 신문이라도 제대로 된 것을 봐라. 행동을 할 용기도 믿음도 없다면 선거에 참여해서 제대로 된 정당이라도 찍으라. 정치인들은 정치하는 것이 일하는 것이다. 당신을 대신해서 정치를 해주는 사람들인데 그 얼마나 좋은가. 부조리한 규칙들과 질서들을 바로 잡아줄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라. 돈 보내는 것도 좋지만, 우린 돈도 없으니까 가장 좋은 것은 선거에 참여해서 투표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20대가 신문을 읽기는 커녕 오히려 조중동을 읽고,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정말 희대의 닭짓인 것이다.
정당선택에 조언을 덧붙인다.서울대 간다고 유치원때부터 아무리 외쳐도 서울대 가는 사람들 주변에 별로 없다. 한나라당이 아무리 당신이 부자된다고 외쳐도 당신이 부자가 될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부자가 될 희망을 접어라는 것이 아니다. "헛된 희망"을 버리고 자신의 위치에 대한 철저한 현실 인식을 하라는 말이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 신한국당때문에 IMF를 겪었고, 조중동은 IMF올 때까지 국민들을 호도했다. 그 대안으로 뽑아준 민주당은 특유의 잡탕성과 기회주의성 때문에 이러지 저러지도 못하여 현실은 악화되거나 유지되었으며 조중동은 노무현정권의 개혁드라이브에 끊임없이 발목을 잡았다. 반동으로 한나라당에 대통령과 의회를 헌납해주었더니 2개월만에 나라를 이꼴로 만들어 놓았다(그들이 멍청한 것인지 너무 노골적이라 한편으로 놀랍고 고맙기도 하다).
20대들도 이제 철저히 학습하자. 제발 이제 철 좀 들었으면 한다. 철이 들어야 "헛된 희망"이 아닌 "참된 희망"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체념하지 말자.
너무 내용이 두서없음을 이해해달라. 할 말이 많았다. 미안하다.
늦게서야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봐도 글이 엉망이지만.
2008/05/11 02:29
우석훈이 20대를 비난할 자격이나 있나?
글에 들어가며
"누가 20대를 죽였는가"라는 글을 보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현실에 대한 처절한 절규,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절망에 가슴이 메였다. 같은 20대로서 이미 남 문제가 아니었다. 썩어문드러진 상처가 곪고 곪아서 이제 우리 20대들 중에 이렇게 SOS를 부르짖고 있는 이들이 있구나. 손을 잡아주기를 바라고 있구나.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구나. 이 울부짖음에 인간으로서, 그리고 같은 20대로서 응하고 싶다. 같이 울고 손을 잡아주고 싶다.
먼저, 현재 우리 세대가 나아가야할 길에 대해서 고민을 할 수 있고 블로그질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이야말로 나보다 더 힘든 삶을 사는 20대에 비하면 극히 지나친 호사임에 미안하다. 나 또한 처절한 생존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다른 20대와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다른 20대보다는 조금은 책을 읽고 조금은 생각을 할 기회가 있었기에 글을 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이제 우리 서로 고민하고 대화해서 서로 연대해서 나아가자고 제안하고 싶다.
20대를 위한 변명
우석훈 선생의 "88만원 세대"를 아직 읽지 않았다. 언젠가는 보겠지만 머릿말을 읽다가 어차피 뻔히 아는 내용일 거라 생각하고 덮어두었다. 어차피 내가 보는 신문에서 보는 그의 칼럼들, 그리고 비슷한 이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말이다. 먼저 20대의 무력함부터 변명하고 한다.
지금의 20대가 그 전 세대들과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좋은 대학만 가면 보장되었던 기존의 한국의 취업질서가 붕괴되었다. 대학에서도 고등학교 시절 못지 않은 취업준비과 경쟁이 요구되었다. 자연히 대학은 취업학교로 전락하였고, 인간성을 논하는 인문학은 자연히 몰락하였다. 평생고용이 보장되었던 정규직은 명목만 남았고, 비정규직이 대세가 되어 고용의 불안은 증가되었다(이 부분에서 짚고 가야할 점은 많은 20대가 386세대(현대 30대 중반이상)가 정규직 자리를 꾀차고 있으면서 20대를 착취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규직인 386세대 이상의 세대들은 살아남은 이들이고, 많은 이들이 40대면 명퇴 등의 명목-38선, 명태 이런 신조어 생김-으로 자영업자 또는 무직으로 전락하였다). 여튼 지금의 20대는 기성세대가 겪은 20대와 달리 훨씬 심한 경쟁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의 추세라면 현재의 10대도 이러한 경향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 개인으로서 형성되는 보편적인 나이가 있다. 사춘기라고 불리기도 하는 보통 10대부터 20대 초반 무렵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모든 세대는 이 시기를 겪고 정체성을 형성했다. 80년 이후에 출생한 현재의 20대는 10대 중반까지는 80년대, 90년대의 호황 아래 비교적 부족함 없이 어느 세대의 10대 초중반보다 행복한 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90년대 중반 이후 호황이 끝나고 IMF를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의 경제가 세계경제로 편입되어 미국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로 아래 놓임으로 인해 극도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세대이다. 그래서 더욱 더 20대는 이러한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에 무력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호황기에 자란 세대가 불황기를 얼마나 현명하게 이겨낼 힘이 있겠는가. 이것으로 20대의 무력함을 변명하고자 한다.
386세대가 대학문을 통과하면 안정적인 삶이 보장될 수 있었다는 것으로 386세대의 극렬하고 목숨을 걸었던 투쟁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군사독재정권은 너무도 공고하였고, 물리적으로 압도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 선두에 섰던 용감했던 이들은 생명을 걸고서야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정의에 대한 신념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투철한 믿음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따랐던 대중으로서의 386들은 대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순간 어느정도 생계는 보장된 것이 현실이었다. 전두환정권과 올림픽을 거쳐서 우리 나라의 경제는 피크를 맞이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지금의 20대처럼 20대를 도서관에 앉아서 영어를 공부하거나 고시를 공부하며 살 필요는 없었고 상대적으로 취업에의 불안에 시달릴 필요도 없었다. Spec이라는 단어도 생겨날 필요도 없었다. 조금은 여유와 낭만이 있었고, 스스로 사유하며 책을 읽고 고민할 시간은 지금의 20대보다 많았다. 이것으로 20대의 무식함을 변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덧붙여 386세대들이 싸워야했던 적은 당시 미국으로 대변되는 제국주의와 군사독재정권이었다. 즉 보이는 적이었고, 물리적이었고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20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고 교묘한 적들이다. 386세대가 이겨내었던 군사독재정권은 적어도 우리 손으로 절단낼 수 있는 적이었다. 그러나 20대가 싸워야할 적은 신자유주의, 우리 손으로 절단낼 수도 없을 것 같은 거대한 흐름, 머리가 커지고 보니 자기도 모르게 편입되어 버린 신자유주의가 그 적이다. 이 적에는 20대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세대가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느끼고 있다. 적이 너무 크고 그 실체조자 모호하기에 칼을 잡지도 못하고 있다. 체념과 비관만이 흐르고 있으며 결국 이명박이 당선되고, 한나라당이 과반을 점유하였다. 물론 저항은 있었다. 그러나 실패하고 결과는 처참했다. 우리의 작은 저항은 뒤에서 말하겠다.
386세대를 향한 저주는 답이 아니다
90년대 초에 구소련이 몰락한 이후 지금의 현재의 모습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본다. 이렇게 급속도록 그리고 광범위하게 그리고 통제불가능하게 세계의 경제질서가 신자유주의로 재편될 것이라고 누가 예측하였겠는가.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이러한 모습이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IMF로 불리는 경제공황 때 경제주체로 뛰고 있는 각 세대(현재의 20대는 제외)는 살아남기 위해서 정말 처절한 노력을 하였고 그러면서 정부도, 사회안전망도, 노조도 시민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들은 무력했거나 무너져 내렸다. 현재까지 노무현 정권은 이러한 것을 회복하려고 했던 당시 20대, 30대의 기존 정치질서에서 실질적인 마지막 저항이었다.
20대들 중 20대를 지켜줄 만한 질서를 만들지 못해서 386세대를 혐오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의도해서 이러한 질서가 생긴 것도 아니고 386세대도 다른 세대처럼 급속도록 재편되는 생존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고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물에 빠져서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 남을 구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고 비난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다. 이들은 새로운 질서를 파악할 지적 역량도 저항할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개가 되어 한나라당을 찍는 386을 저주할 수도 있겟다. 그러나 같이 개가 되어 한나라당을 찍은 판에 누가 누구를 원망할까.
따라서 지금의 20대가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386세대를 향한 분노는, 청소년들의 기존질서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여 덜 큰 어린아이가 징징대는 꼴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마치 온실속에서 곱게 큰 아이가 세상풍파에 던져졌을 때에 무기력하여 주저앉는 것과 같이, 고도의 호황 때 10대의 일부를 보낸 지금의 20대는 갑자기 거친 세상풍파를 만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불황기에 태어나 세상풍파를 견디고 자란 지금의 10대보다 20대가 더 나약해 보이는지도 모른다.
현실인식의 결핍, 20대에 사춘기를 겪다
미국쇠고기수입협정반대집회에 나가는 10대들에 비교되는 20대들 중 욱하는 심정이 생길 만도 하다. 사실 비교당하는 지금의 20대가 억울한 면이 많다. 10대는 적어도 지금 생계, 즉 밥벌이의 문제에 직면해 있지는 않다. 아직은 부모와 학교의 보호 아래 있다. 그러나 20대는 먹고사니즘 문제에 직면하여 있다. 그래서 나는 감히 쉽게 도서관에서 토익공부를 하고 있는 20대에게 거리로 나갈 것을 제안하지 못한다. 직장에서 밤 10시까지 야근을 하며 고된 일과에 행복을 헌납하며 회의를 느끼는 20대에게 노조를 만들거나 가입할 것을 제안하지 못한다.
미취업과 해고라는 감당하기 힘든 불안이 그렇게 한다고 해결될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거리로 나가서 해결되기에는 정부는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고(그래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했던 것이다) 한 번 무너진 신뢰로 생긴 불안은 지독하게도 깊고 넓다. 연대는 기대하기 낙망하다. 내가 길거리를 나설 때 그 시간에 공부를 한 시간 더 해서 나보다 점수를 더 받을 학생들, 내가 노조에 가입하여 회사에 낙인 찍힐 때 끊임없이 원서를 들이대고 있을 수 많은 미취업자들이 드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군인은 하나의 물건에 불과하듯이, 우리는 이미 기업에게는 소모품이자 기업에서 생산한 물건을 소비하다 그다지 길지 않은 삶 살다 죽는 객체로 전략한지 오래다.
미성숙할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보다 주변과 사회에 대한 분노만 커져간다. 물론 정당한 분노가 있을 수 있고 이러한 것이 행동으로 이어질 때 사회는 분명 변화된다. 그러나 기성세대를 향한 유아기적인 몸부림은 답이 아니다. 그들도 지금 질서의 피해자이고 현실인식을 못해서 같이 개가 되어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두 손으로 같이 뽑았다. 같은 피해자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은 화난다고 동료에게 총부리질을 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정당하지도 않고 변화시킬 수 없는 분노이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우리가 노무현을 왜 사랑했다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생존경쟁의 질서의 변화를 갈망했다. 386세대에게는 잊고 있었던 옛 첫사랑이었을 모르겠지만 노무현은 20대에게는 현재의 첫사랑이었다. 그만큼 뜨거웠고 기대도 컸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획일화된 교육(이 것은 모든 세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이러한 교육으로 인해 20대임에도 덜 자랄 수 밖에 없다.)을 받고 자라 현실에 대한 합리적이고 냉철한 인식은 없었지만, 노무현은 "변화"를 약속했었고 무엇인가 지금 짜여진 질서에 대한 거부감과 분노를 20대는 노무현을 사랑함으로서 분출하였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확대대는 비정규직 문제를 20대는 보았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 더욱 심해진 생존경쟁,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 끊임없이 양산되는 낙오자들을 보면서 20대는 좌절했다. 철저한 학습과 현실인식을 기대하기 힘든, 즉 덜 자란 20대에게는 반동만이, 악다구니만이 남았다. 마치 노무현 한 사람 때문에 모든 것이 잘못 된 것처럼.
젊을수록 학습능력이 좋고 도덕적인 경향이 있다. 20대는 노무현 정권에서도 과거와 다름없이, 비도덕적이고 시장경제의 룰을 어긴(부동산투기 등) 이들이 노동을 해서 정당하게 벌어들이는 이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예전부터 이런 일들(강남특수, 올림픽특수의 부동산 투기)은 비일비재하였지만 노무현 정권들어서 더 심해졌다(이명박 정권들어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된 것을 보면 이것이 노무현 정권이 가속화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철면피같은 냉혈한들이, 인간을 도구화시키는 이들이 물질적으로 성공하고, 물질적으로 성공한 것이 능력있고, 도덕적이고, 사랑받는 이들(요즘 나오는 거론할 가치도 없는 거의 모든 자기계발서에서 이렇게 떠든다)라고 20대는 세뇌당했다. 20대의 학습능력이 그들의 도덕성을 압도하는 순간 20대는 스스로 무기력한 사회의 부속품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 모든 세대 모두 다를 바 없다. 덜 자란 20대는, 덜 자란 국민들과 함께 스스로 개가 되어 이명박과 한나라당에 꽃을 바쳤다.
20대를 위한 제안
내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얼마 없다. 그래서 나도 무력함과 비애감을 많이 느낀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기성세대와 기성질서를 향해서 자조하지는 않는다.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고, 인간에 선함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역사를 비롯한 사회과학에 대한 작은 공부가 나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미 신뢰와 믿음 연대 변화가능성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말하고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제안하는 것은 아직 나에게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도 썼다.
먼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알아야 한다. 당신이 자신과 주변, 그리고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잃어버리는 순간, 당신은 기존 질서를 이루는 하나의 부속품이 될 것이고(그것이 밑바닥일지 정점일지는 모르겠다만) 당신은 부속품이 되는 순간 정점에 오르기 위해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밖에 없으며, 훗날 썩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40대, 50대에 발견하게 될것을 말이다. 지금도 많은 40대. 50대의 가장들이 자식들에게 무시받고 아내에게 버림받으며, 자신의 허송해버린 젊은시절을 안타까워하며 우울증에 빠져들고 있음이 증명한다. 얼마 전에 삼성비리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도 스스로 밝혔듯이 이러한 부류중에 하나였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공부와 행동이다. 기존 교육제도에서 배울 수 없었던, 그래서 386세대를 향해서 "왜 알려주지 않았냐고" 울부짖었던 것들을 우리 스스로 배울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386세대도 우리와 같은 주입식 획일화된 교육을 받고 자랐고 그들도 개인으로 각성하지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그들도 배우지 못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지 못했다는 점을 잊지 말고, 우리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 이 공부가 토플공부가 아님은 물론이다. 틈틈히 사회과학과 인문학 공부를 하자. 정말 "틈틈히"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일단은 살아남아야 행동을 할 수 있으니, 도서관 대신 거리로 나가라거나, 직장에서 노조를 만들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는 없다. 너무 위험부담이 크고 현재 그렇게 하면 지금의 질서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분위기상 당신이 나간다고 남들이 같이 나간다는 보장도 없고, 이 사회는 이미 낙오자는 돌보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신뢰와 믿음을 잃는 것은 쉽고 쌓는 것은 너무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당신 혼자 설치다가는 또라이 되기가 쉽다는 말이다. 스스로 영웅이 되지 말고 주변의 동지들을 만들라.
그래서 나는 제안한다. 공부할 시간이 없고 열의도 없다면 신문이라도 제대로 된 것을 봐라. 행동을 할 용기도 믿음도 없다면 선거에 참여해서 제대로 된 정당이라도 찍으라. 정치인들은 정치하는 것이 일하는 것이다. 당신을 대신해서 정치를 해주는 사람들인데 그 얼마나 좋은가. 부조리한 규칙들과 질서들을 바로 잡아줄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라. 돈 보내는 것도 좋지만, 우린 돈도 없으니까 가장 좋은 것은 선거에 참여해서 투표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20대가 신문을 읽기는 커녕 오히려 조중동을 읽고,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정말 희대의 닭짓인 것이다.
정당선택에 조언을 덧붙인다.서울대 간다고 유치원때부터 아무리 외쳐도 서울대 가는 사람들 주변에 별로 없다. 한나라당이 아무리 당신이 부자된다고 외쳐도 당신이 부자가 될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부자가 될 희망을 접어라는 것이 아니다. "헛된 희망"을 버리고 자신의 위치에 대한 철저한 현실 인식을 하라는 말이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 신한국당때문에 IMF를 겪었고, 조중동은 IMF올 때까지 국민들을 호도했다. 그 대안으로 뽑아준 민주당은 특유의 잡탕성과 기회주의성 때문에 이러지 저러지도 못하여 현실은 악화되거나 유지되었으며 조중동은 노무현정권의 개혁드라이브에 끊임없이 발목을 잡았다. 반동으로 한나라당에 대통령과 의회를 헌납해주었더니 2개월만에 나라를 이꼴로 만들어 놓았다(그들이 멍청한 것인지 너무 노골적이라 한편으로 놀랍고 고맙기도 하다).
20대들도 이제 철저히 학습하자. 제발 이제 철 좀 들었으면 한다. 철이 들어야 "헛된 희망"이 아닌 "참된 희망"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체념하지 말자.
너무 내용이 두서없음을 이해해달라. 할 말이 많았다. 미안하다.
늦게서야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봐도 글이 엉망이지만.
2008/05/11 02:29
# by | 2008/05/14 04:00 | 검정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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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몰가치화된 교육으로 인해 30대가된 지금에서야 사춘기를 겪고 있는 것 같네요. 생존의 문제에 직면한 20대에게 "생존을 포기하고(공부고 회사고 다 때려지고) 연대하라."라고 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지요.
지금의 10대들의 정치참여의지나 20대의 생존본능을 폄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자체를 부정하는 거니까요. 좋은 사회는 남을 인정하는데서 부터 오는 것이니, 그들을 인정하고 격려가 동반된 비판을 통해 좋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야겠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전 어제 회식때 숙취로 인해 아침부터 헤롱헤롱하네요. 정신연령은 늘지 않는데 신체적 연령만은 계속 먹어가니 이것 참..ㅜㅜ
여튼 저 글의 발단이 된 글을 보았을때 386세대를 향해 그런 독같은 말을 내뿜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분노가 조금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애초에 저는 88만원세대를 읽지도 않긴 했습니다만 들리는 이야기에 30대 이상을 기득권을 쥔 적처럼 묘사하는 느낌이 들던데, 그들은 더 노력했고 더 많이 경험했으며, 그들도 20대만큼이나 자신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한 사람이며 살아야 한다는 욕망을 가진 존재인만큼 딱히 그것을 욕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물론 읽어보고 나서 평할 일이겠습니다만 거기에서 '빼앗아라'를 읽어낸 듯한 분들이 많아서 조금 그랬습니다-_-;
사실 20대로서 동년배 20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나입니다. 남들의 눈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머리로 생각해 어떻게 사는 것이 자신에게 행복한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하라는 것. 최고, 최강이 행복과 탄탄대로를 보장한다는 환상에서 깨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무리 경쟁이 어쩌니 저쩌니 먹고사니즘이 최고라고 해도 개처럼 벌어먹고 사는거면 고민하지 않고 살아도 됩니다. 자신의 행복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연봉 1억이고 자시고 그 삶에 의미가 있나요.
약 2년 전 쯤 고3이 수능보고 인서울 못하면 인생 쓰레기고 버리는 건 줄 안다는 분위기가 반에 팽배하다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날때마다 참 씁쓸합니다.
Dien/ 시험받을 기회가 없었던 도덕성이기도 하고요. 어렸을 때의 도덕성이란...그리고 그것을 지켜내는 힘이 생긴 도덕성이야말로 정말 멋지죠. 전 사실 그다지 도덕적이지 못하기도 하고. 그래도 철든 뒤로는 양심만은 지키고 살고 싶다고 결심했습니다.
정말 자기 인생과 길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것은 학교에서 갈쳐주지 않아요. 학교에서 기회라도 줘야하는데, 그래서 교육이 너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감정적으론 '20대도 먹고살기 힘들다는거 좀 알아주셈'같은 부분은 동감이었습니다만.
서로가 서로를 탓해선 앞으로 나아갈 수 없죠, 정말. 요즘 우리사회는 경쟁과 편가르기와 쌈박질만이 전부 같아요.